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술의 변 (문단 편집) == 영향 == 명나라의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수도 베이징이 북방민족들의 침입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제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명나라는 건국 당시 난징에 수도를 두었으나 연왕 주체가 [[정난의 변]]을 일으켜 조카인 [[건문제]] 주윤문을 제거하고 [[영락제]]로 즉위하면서 수도를 자신의 거점인 동시에 몽골족의 침입에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막북 지역 진출의 교두보로 쓸 목적으로 베이징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수도인 베이징은 [[만리장성]] [[국경]]에서 불과 60km 정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산해관만 넘으면 베이징이 순식간에 유린당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고, 경술의 변 사건으로 그 맹점이 노출되고 말았다. 영락제 시기에는 명나라가 북방 민족에 공세를 가하는 위치였기 때문에 베이징이 유리했지만 [[토목의 변]] 이후 명나라가 쇠퇴기에 접어들며 원정 대신 수세에 집중하면서 국경과 가까운 베이징은 오히려 방어에 불리했고, 결국 이 문제는 청나라의 베이징 입관으로 또다시 중국 대륙이 이민족에게 지배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물론 당시 황제였던 의종 숭정제는 베이징이 불리함을 알고 난징으로 천도하는 것도 고려했다. 하지만 당시 숭정제 휘하의 병력은 산해관을 지키는 오삼계의 병력밖에 없었는데 이들을 데리고 남천하다가 청군 팔기병의 추격을 받는 것이 우려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이자성의 난으로 지방군까지 와해되어 천도 과정 중의 안전조차 장담할 수 없어 사실상 불가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